솔직히 저는 한동안 지역균형발전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막연히 좋은 정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울이 너무 비싸면 다른 도시를 키우면 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직접 여러 사례를 파고들수록 우리 정책이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서울 집값 문제의 뿌리는 생각보다 훨씬 구조적입니다.
지역균형발전, 왜 우리는 번번이 실패했나
일반적으로 지역균형발전은 전국 곳곳에 혁신도시를 만들면 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 논리는 현실에서 거의 작동하지
않습니다. 혁신도시(Innovation City)란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기 위해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하고 산업 거점을 조성하는 정책
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선택과 집중 없이 전국에 흩뿌려지면, 에너지가 분산되어 어디도 실질적인 거점이 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혁신도시 지정 과정을 보면, 처음에 두세 곳을 거점으로 논의하다가 정치적 압박 속에 결국 열 곳 가까이로 늘어났습니다. 지방의료원 거점 병원 문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5개 거점으로 역량을 집중했어야 할 것을 지자체 로비에 밀려 12개로
늘리면서 다 같이 부실해진 것과 똑같은 구조입니다. 제가 이 두 사례를 나란히 놓고 보면서 느낀 건, 우리나라 정책 실패의 패턴이 놀랍도록 반복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코트다쥐르의 소피아 앙티폴리스 사례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소피아 앙티폴리스(Sophia Antipolis)란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지중해 연안에 조성된 유럽 최대 규모의 R&D 클러스터입니다. 여기서 R&D 클러스터란 연구개발 기관과 기업이 한 지역에 집적
되어 시너지를 내는 산업 생태계를 말합니다. 프랑스는 이 지역을 기계적으로 모든 도시에 복사하지 않고, 지중해라는 자연환경을 활용해 기초과학 연구자들이 10~15년간 진득하게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알카텔, 오라클, 필립스 같은
글로벌 기업의 연구소가 자발적으로 모여든 것은 그 결과입니다.
우리나라도 성공 사례가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세계은행(World Bank)이 개발도상국 지역균형발전의 성공 사례로 가장 자주 인용하는 게 한국의 울산, 포항, 광양입니다(출처: World Bank). 한일 수교 보상금의 상당 부분을 포항제철 한 곳에 집중 투자한 것, 조선 산업을 울산 한 곳에 몰아 키운 것이 지금의 산업 거점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선택과 집중이 실제로 작동했던 사례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지역균형발전 실패의 핵심 원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선거를 앞두고 특정 거점 대신 전국 배분 방식으로 정책이 왜곡됨
- 에너지가 분산되어 어디도 서울의 대안이 될 수준에 도달하지 못함
- 공실이 높은 혁신도시만 양산되고, 정작 인재와 기업은 수도권으로 계속 집중됨
- 지자체마다 동일 산업(바이오, 2차전지 등)을 중복 육성해 클러스터 효과 소멸
분양제도와 서울 집값, 아무도 말 안 하는 진짜 원인
집값 문제를 이야기할 때 공급 확대, 금리 인상, 다주택자 규제 같은 이야기가 주로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다주택자를 줄이면 집값이 안정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생각에는 오히려 반대입니다. 전월세 매물을 공급하는 다주택자를 줄이면 임대 공급이 줄어들고,
공급이 줄면 임대료는 오릅니다. 기본적인 수요공급 원리인데 정부는 이걸 거꾸로 적용하고 있다는 게 제 오랜 의문이었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지역우선 1순위 분양제도입니다. 이 제도는 해당 지역 거주자에게 신규 아파트 청약 1순위를 부여하는 방식
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지역 주민 보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청년들이 좋은 입지의 분양 기회를 얻기 위해 서울과 수도권으로
이주를 결심하게 만드는 강력한 유인이 됩니다. 거주이전의 자유(Freedom of Residence)란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인데, 이 제도는 사실상 지방 거주자의 서울 분양 기회를 차단함으로써 그 자유를 실질적으로 제한합니다.
만약 지역우선 분양 조건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임대료가 훨씬 저렴한 지방에 살면서도 서울 청약에 도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굳이 비싼 서울 월세를 내며 올라올 이유가 줄어들고, 서울의 임대 수요 폭증도 자연스럽게 완화됩니다. 지방 공동화
현상도 속도가 늦춰질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전문가라는 분들도 잘 언급하지 않는데, 아마 표를 잃을까 봐 정치권에서 건드리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서울의 도시 구조 문제도 짚어야 합니다. 서울의 도심(CBD, Central Business District)은 오랫동안 종로, 강남, 여의도(영등포)
세 곳으로만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CBD란 업무, 상업, 금융 기능이 집중된 도시 핵심 거점을 말합니다. 문제는 이 세 곳이 한강 주변에 밀집해 있다 보니 한강 인근 주거지가 세 곳 모두에 접근 가능한 황금 입지가 되어버린다는 점입니다. 수요가 몰리면 가격이 오르는 건 당연한 수순입니다. 수유동, 수서동, 발산동 같은 외곽에 거점이 분산되었다면 이 집중 현상은 상당 부분 희석되었을 것입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수도권 인구 집중도는 전체 인구의 50.7%를 넘어섰고, 이 수치는 계속 상승 중입니다.
(출처: 통계청). 어느 지방 농기계 회사가 AI 인력을 채용하려다 안 뽑혀서 결국 서울에 자회사를 차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자회사로 인해 지방의 누군가가 또 서울로 올라옵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깔짝깔짝 세금 혜택이 아니라, "이래도 되는 거야?" 싶을 만큼 파격적인 인센티브가 필요합니다. 물줄기를 바꾸는 건 토목 공사 수준의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니까요.
지금 정부 정책을 보면 공급은 막고 유동성은 계속 공급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성과급이 풀리는 시점과 맞물리면 이 수요가 어디로 향할지는 불 보듯 뻔합니다. 부동산 시장에서 수요공급 불균형(Supply-Demand Imbalance)이란
수요는 늘어나는데 매물 공급이 제한될 때 가격이 폭등하는 구조적 현상입니다.
결국 서울 집값 문제는 단순한 투기 심리나 금리 문제가 아닙니다. 지역 거점 육성 실패, 분산되지 않는 도심 구조, 이주를 촉진하는 분양 제도, 거기에 임대 공급을 오히려 줄이는 규제까지 겹쳐있습니다. 파격적인 지방 인센티브 정책이든 분양 제도 개편이든, 어느 방향이든 지금보다 훨씬 큰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미 해봤는데 안 되던데요"라는 말이 가장 위험한 생각입니다. 해봤던 방식이 애초에 틀렸을 가능성을 먼저 따져봐야 합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부동산 또는 금융 투자 조언이 아닙니다.